











북한산 영해박씨 묘역(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 산8)
영해박씨는 조선조에 모두 43명의 역과 급제자를 배출한 전현직인 역관 중인 집안이다. 현재 북한산 영해박씨 중흥동 묘역에는 역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에 이른 박치검(朴致儉) 시중공파 양주문중 53대 손과 역시 역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에 이른 아들 박명준(朴命浚) 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 묘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첨지중추부사 박치검(朴致儉)의 墓
<역관 박치검(朴致儉) 자료>
<역관 박치검 묘표(譯官 朴致儉 墓表)>
위치 : 진관동 산8번지 일원중골마을 (북한산)
형태 : 원수형(圓首形) 3면비(三面碑)
서체 : 해서체(楷書體)
비신 : 높이 127.5㎝, 가로 56.5㎝, 세로 27.3㎝
비좌 : 높이 45㎝, 가로 100㎝, 세로 66㎝
기단 : 높이 17㎝, 가로 126㎝, 두께 93㎝
상석 : 높이 65㎝, 가로 122㎝, 세로 83㎝
<비양(碑陽 : 전면>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兼 五衛將 朴公致儉之墓
淑夫人安東張氏?左
<비음(碑陰 : 후면)>
公姓朴氏。諱致儉。字景和。系出寧海。曾祖諱尙根贈參議。祖諱昌漢贈左尹。考諱春大同中樞。?貞夫人龍仁朴氏奉事諱敬諭女。公以英宗壬申十二月初二日生。事親有至性。處昆弟友愛篤至。訓兒孫樹門戶。規度整嚴恙皆賴仰焉。今上甲子十二月二十一日卒。享年五十三。葬于楊州中興洞負乙坐之原新卜也。距先兆不數里而近。配淑夫人安東張氏奉事宅仁女。英宗癸酉九月二十七日生。今上甲戌十二月十九日卒。享年六十二。?公墓左。居一男一女。男命浚通政。初娶趙尙珍女。再娶吳命權女。女玄在朋。側室一男一女。男命洙。初娶玄?女。再娶吳泰浚女。女韓相璡。內外孫幼不盡記。
道光 元年 辛巳 月日 不肖男 命浚 泣血謹識
<국역>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박공치검의묘. 숙부인안동장씨를 좌측에 합장함(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兼 五衛將 朴公致儉之墓 淑夫人安東張氏?左)”
공의 성은 박씨요, 이름은 치검(致儉)이며, 자는 경화(景和)이다. 선계는 영해(寧海)에서 나왔다.
증조부의 이름은 상근(尙根)이니, 관직이 증참의(贈參議)요. 할아버지의 이름은 창한(昌漢)이니, 증좌윤(贈左尹)이요. 아버님 이름은 춘대(春大)이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다. 어머님은 정부인(貞夫人) 용인박씨(龍仁朴氏)이니, 봉사(奉事) 경유(敬諭)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英祖) 임신년인 1752년(영조 28) 12월 2일에 태어났다. 지극한 정성으로 어버이를 모셨고, 형제간에는 우애(友愛)가 넘쳤으며, 자손을 가르쳐서 문벌(門閥)을 확립하였다. 가법(家法)이 엄정(嚴整)하였으며, 친척들이 모두 신뢰하고 존경하였다.
금상(今上) 갑자년인 1804년(순조 4) 12월 21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53세이다. 양주(楊州) 중흥동(中興洞) 을좌(乙坐)를 등진 언덕에 장사지내니, 새로 조성한 무덤이다. 선영에서 몇 리 떨어진 가까운 거리이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안동장씨(安東張氏)이니, 봉사(奉事) 택인(宅仁)의 따님이다. 영조 계유년인 1753년(영조 29) 9월 27일에 태어나서 금상 갑술년 1814년(순조 14)인 12월 1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62세이다. 공의 묘 좌측에 합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준(命浚)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인데, 첫 부인은 조상진(趙尙珍)의 부인이고, 둘째 부인은 오명권(吳命權)의 따님이다. 따님은 현재붕(玄在朋)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소생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수(命洙)로 첫 부인은 현영(玄?)이요, 둘째 부인은 오태준(吳泰浚)의 딸이며, 따님은 한상진(韓相璡)에게 시집갔다. 내외자손은 어려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도광 원년(道光 元年) 신사년인 1821년(순조 21) 월 일에 아들 명준(命浚)은 삼가 기록한다.
박치검(朴致儉)
상세정보 자료수정내역 [ 원문이미지보기 ] .[역과] 정조(正祖) 1년(1777)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3등(三等) 1위(9/14)[인물요약]
자 경화(景和)
생년 임신(壬申) 1752년(영조 28)
합격연령 26세
본관 영해(寧海)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4명
품계 통정대부(通政大夫)
품계 절충장군(折衝將軍)
관직 교회(敎誨)
관직 총민(聰敏)
전공 왜학(倭學)
[가족사항]
[부]
성명 : 박춘대(朴春大)
관직 : 동지(同知)
[조부]
성명 : 박창한(朴昌漢)
[증조부]
성명 : 박상근(朴尙根)
[외조부]
성명 : 박경우(朴敬佑)
본관 : 남양(南陽)
[처부]
성명 : 장택인(張宅仁)
본관 : 안동(安東)
관직 : 압물(押物)
전공 : 한학(漢學)
[안항:형]
성명 : 박치륜(朴致倫)
[안항:제]
성명 : 박치경(朴致儆)
성명 : 박치신(朴致信)
성명 : 박치임(朴致任)
[출전]
『역과방목(譯科榜目)』(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98])
<조선왕조실록 박치검 관련 기사>
우의정이 뇌물을 받고 왜인과 교통한 역관들의 죄상과 처리안을 아뢰다
차대(次對)하였다.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이 아뢰기를,
“동래부(東萊府)의 간사한 역관(譯官)들이 왜인과 교통(交通)하여 뇌물을 받고 나라를 속인 죄상이 이제 이미 안핵사(按?使)의 밀계(密啓)에서 모두 탄로가 났는데,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극악(極惡)이요 대대(大?)인 것입니다. 수악(首惡)은 박준한(朴俊漢)· 박치검(朴致儉)이고, 동참(同參)한 자는 김형우(金亨禹)인데 방헌(邦憲)을 가하기도 전에 귀주(鬼誅)가 먼저 이르렀으니, 더없이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두 놈의 아들들에게는 산배(散配)시키는 형법(刑法)을 시행하게 하소서. 흉모(凶謀)를 답습하여 서계(書契)를 위조한 최경(崔)·최국정(崔國楨)은 안핵사와 해부사(該府使)로 하여금 저들이 보는 곳인 관문(館門) 밖에서 효수(梟首)하게 하고, 위조한 서계를 서사(書寫)한 박윤한(朴潤漢)과 도서(圖署)를 위조한 김한모(金漢謨)는 수악(首惡)에 견주어 보면 비록 차등이 있기는 합니다만, 악한 짓을 같이하며 나쁜 짓을 도왔으니, 단지 위조한 것만으로 감죄(勘罪)하여 대시(待時)의 형률에 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모두 일체 똑같이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손수 뇌물을 전한 김무언(金武彦)은 엄중한 형신(刑訊)을 가한 다음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시키고 최경 등이 뇌물로 받은 포목(布木)은 즉시 징출(徵出)하여 저 왜인들에게 환급(還給)하게 하소서. 을묘년 가을서부터 10년 이래로 두 나라의 사이가 이들에게 속아서 우롱당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우리 나라를 속였고 밖으로는 이웃 나라를 속였으므로 강호(江戶)에서는 매우 의아스러운 데 관계된다는 말이 있었고 대마도(對馬島)에서는 진위(眞僞)를 조사해보고 싶다는 말이 있게 되었는데, 이제 죄인을 잡았으니 분명히 전형(典刑)을 바룬 뒤에는 의당 저 사람들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해야 합니다. 우선 내백(萊伯)으로 하여금 엄중한 말로 관수(館守)를 책유(責諭)하고 이어 도해 역관(渡海譯官)을 들여보내어 특별히 서계(書契)를 보내겠다는 뜻을 관수를 시켜 대마도에 통지하게 해서 대마도로 하여금 즉시 와서 청하게 하도록 하소서. 신행(信行)은 곧 교린(交隣)에 있어 중대한 일인데 다만 이 무리들이 농간을 부린 일 때문에 연한(年限)이 점점 가까워오는데도 강정(講定)이 아직 지체되고 있으니, 국체(國體)에 있어 더욱 놀랍고 통분스럽습니다. 사행(使行)이 강호(江戶)에 도달하는 것과 의물(儀物)을 한결같이 구례(舊例)대로 준행할 것을 또한 내백으로 하여금 관수에게 통지하여 속히 강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어 두 역관(譯官)이 받은 뇌물인 공목(公木)은 해도신(該道臣)으로 하여금 조비(措備)하여 동래부(東萊府)로 수송하게 하고 그 대신으로 경사(京司)에 상납할 것을 환용(換用)하게 하였다.
【원전】 47 집 515 면
【분류】 *사법(司法) / *외교-왜(倭)
[주D-001]을묘년 : 1795 정조 19년.
[주D-002]강호(江戶) : 일본 동경의 옛 칭호.
[주D-003]내백(萊伯) : 동래 부사.
출 전 : 순조 5년 을축(1805,가경 10) 8월28일 (무신)조 기사
비국에서 출정한 사람의 공죄를 가려 아뢰고 종사관·장관 등의 별단을 올리다.
평안도의 장사 군관 별단.
병영의 장사 군관 한량 왕사현(王思賢)은【송림에 출전하여 대진을 따라다니며 안형복(安亨馥)과 함께 운흥(雲興)의 적둔(賊屯)에 가서 정탐하여 적정을 먼저 보고하였다.】 상으로 가자하였다. 직부(直赴) 이의승(李宜承)과【송림과 곽산 두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있는 힘을 다하여 방어하였다.】 한량 이심일(李心鎰)·한정신(韓正臣)은【송림과 곽산 전투에 참가 하였는데, 적을 격파하던 날 앞장서서 먼저 성벽에 올라갔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한다. 한량 백인서(白麟瑞)와【송림과 곽산 전투에서 모두 전공(戰功)이 있고 적 휘하의 김이국(金理國) 등을 사로잡았으며, 적이 대진을 겁략할 때 뒤쫓아가 적을 죽였다.】 김낙홍(金洛弘)·【대진이 겁략 당할 때 적 5명을 사로잡았다.】 과거 출신(出身) 최천학(崔天鶴)·【송림에 출전하여 대진을 따라다니며복 병장이 되어 적 9명을 붙잡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하라. 과거 출신 김인덕(金仁德)과【송림에 출전하였고, 대진으로 나가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겸사복(兼司僕) 구즙(具緝)·오명회(吳命恢)는【송림에 출전하였다가 대진으로 가서 복병장이 되어 흙 파는 역사를 감독하였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하고, 한량 이인협(李寅協)과【송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후에 대진에 나가 복병장이 되어 북성(北城)의 요해처를 지키고 북성(北城)의 흙 파는 일을 감독하였다가 이마에 화살을 맞았다 성을 격파하던 날 병든 몸을 이끌고 군사를 거느려 입성하였다.】 향인(鄕人) 이건악(李健岳)·【곽산에 출전하였고 성을 격파한 후 대진으로 가 접전하다가 탄환을 맞았다.】 과거 출신 서백석(徐百碩)은【접전할 때 탄환을 맞았다.】 모두 상으로 가자한다. 과거 출신 김창신(金昌信)은【송림 전투에서 앞장서서 적을 추격하였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한량 이희엽(李禧燁)과【송림 전투 후에 이영식(李永植)을 따라 다복동(多福洞) 적의 소굴을 쳐서 적의 기치(旗幟)를 빼앗았다.】 김후덕(金厚德)은【이영식을 따라가 다복동 적의 소굴을 쳤고 대진으로 나가 복병장이 되었다.】 모두 본도에서 수용한다. 과거 출신 김성록(金聲菉)은【송림에서 대진으로 가 접전 중에 화살을 맞았다.】 상으로 가자하고, 과거 출신 장치영(張致榮)은【송림에 출전하였다가 이내 진으로 나가 우영장(右營將)의 행군 집사(行軍執事)가 되었다.】 본도에서 시상한다. 한량 변득렴(邊得?)은【송림에서 대진으로 나가 접전할 때에 화살을 맞아 정월에 먼저 돌아왔다.】 상으로 가자하고, 한량 한무흥(韓武興)은【대진이 겁략 당할 때에 적 1명을 베었다.】 본도에서 시상하고, 전 만호 박대욱(朴大旭)은【복병장(伏兵將)으로 접전할 때 탄환을 맞아 3월에 병으로 돌아왔다.】 상으로 가자하고, 과거 출신 계응화(桂應華)와【북성(北城)을 파는 부역에서 심부름을 하였다.】 한량 박치검(朴致儉)은【송림 전투에서 앞장서서 쫓아갔으며 북성의 흙을 팔 때에 역사를 감독하였다.】 모두 본도에서 시상한다.
◆ 지중추부사 박명준(朴命俊)의 墓
역관 박명준(朴命浚) 자료
위치 : 진관동 산8번지 일원중골마을 (북한산)
형태 : 원수형(圓首形) 3면비(三面碑)
서체 : 해서체(楷書體)
비신 : 높이 117.5㎝, 가로 49㎝, 세로 31㎝
비좌 : 높이 48㎝, 가로 107㎝, 세로 76㎝
상석 : 높이 37.5㎝, 가로 112.5㎝, 세로 81.5㎝
<비양(碑陽 : 전면>
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朴公諱命浚之墓
贈貞夫人白川趙氏?左
貞夫人樂安吳氏?左
<비음(碑陰 : 후면)>
府君諱命浚。字維淸。系出寧海。考諱致儉贈判書。?贈貞夫人安東張氏奉事諱宅仁女也。府君以正宗丁酉十二月十三日生。今上已?二月謫湖南之黑山島。丙午正月一日棄不肖于謫舍。享壽七十。嗚呼。不肖扶?而歸。二月十八日啓原。配贈貞夫人白川趙氏。舊塋同?卽先兆負乙之原也。府君德性寬厚容儀?碩。發言處事不立崖岸。不爲表暴。而未嘗以聲色加人。以是識與不識咸慕悅之無異辭。純宗甲戌始以職任。周旋於交隣之際。有勞勣累蒙晉秩之典。戊寅通政。丙申至崇政。上下數十餘年居任菜釜者久矣。故洞察邊情。隨宜施措悉中?要。土民有遺愛之感立碑頌德。卽以狡夷之區。測每與論事。亦皆心折而不敢欺其情。盖府君之素所見孚於中外者如此也。尙忍言哉。尙忍言哉。以府君平日仁善慈厚。宜克享安全之福。而晩罹橫禍。遂易?於海外。此豈非推之天理。而不可諶究之人事。不可驗者歟。嗚呼。不肖抱徹天極地之寃。而木石冥頑延食。息於今日昭昭彼蒼。庶幾鑑此方寸也夫。繼配貞夫人樂安吳氏。艱于嗣不肖日榮入繼。側室二女。長適李尙有次未?。不肖妻五衛將金寅哲女。取從子有性爲後。有性妻金棨女一男幼。
道光 二十六年 七月 日 立
孫 僉樞 日榮 謹撰
孫 主簿 有性 謹書
<국역>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 박공 명준의 묘. 증정부인 백천조씨를 좌측에 합장하고, 정부인 낙안오씨를 좌측에 합장함(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朴公諱命浚之墓贈貞夫人白川趙氏?左貞夫人樂安吳氏?左)”
부군(府君)의 이름은 명준(命浚)이요, 자는 유청(維淸)이니, 선계(先系)가 영해(寧海)에서 나왔다. 아버님의 이름은 치검(致儉)이니 판서(判書)의 증직(贈職)을 받았고, 어머님은 정부인(貞夫人)의 증직을 받은 안동장씨(安東張氏)인데 봉사(奉事) 택인(宅仁)의 따님이다. 부군은 정조 정유년인 1777년(정조 1) 12월 13일에 태어나서 금상 기해년인 1839년(헌종 5) 2월 달에 호남(湖南)의 흑산도(黑山島) 에 귀양갔다가 병오년인 1812년(헌종 12) 1월 1일에 귀양지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70세이다. 아아! 불초가 운구(運柩)하여 돌아가서 2월 18일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배천조씨(白川趙氏)로 옛 선영에 합장하니 곧 선영 을좌(乙坐)를 등진 언덕이다.
부군은 덕성(德性)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그릇이 크게 행동하였다. 말하는 것과 일처리 할 때는 모가 나지 않았고, 화내거나 일찍이 남에게 싫어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아는 자나나 모르는 자나 모두가 존경하고 좋아하여 다른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순조 갑술년인 1814년(순조 14)에 처음으로 관직을 맡아서 외교(外交)에 공로(功勞)가 있어서 여러 번 좋은 자리에 승진하는 은전을 입었으며, 무인년인 1818년(순조 18)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병신년인 1836년(헌종 2)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상하 수십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수고한 지가 오래였으므로 변경의 정세를 통찰(洞察)하여 적당한 것을 따라서 조처하니 모두가 적적한 조처였다. 고을 주민들이 사랑하는 마음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교활한 오랑캐의 구역에 나아가서는 매양 여론(與論)을 헤아려서 처리하니 또한 모두 마음을 접고 감히 그 실정을 속이지 못하였으니, 대개 부군께서 평소 조정과 민간에서 믿음을 받은 바가 이와 같았다. 어찌 차마 말하리오? 어찌 차마 말하리오? 부군께서 평일에 어진 선행과 두터운 사랑을 베풀었으니, 마땅히 최고로 좋은 복을 누려야 마땅하지만 만년에 뜻하지 아니한 재난을 당하여 마침내 바다 밖에서 죽음을 맞았으니, 이 어찌 하늘의 이치를 연구한다면 사람의 일을 진심으로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인데, 시험하기가 어려운 것임인가?
아아! 불초가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고통스런 생활로 연명하였으나 오늘에야 밝은 세상을 만나서 쉬게 되었으니, 거의 이제야 본마음을 보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새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낙안오씨(樂安吳氏)인데, 후사를 갖지 못하여 불초 일영(日榮)을 양자로 들였다. 측실 소생에 딸 둘을 두었으니, 장녀(長女)는 이상유(李尙有)에게 시집갔으며, 차녀(次女)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불초의 아내는 오위장(五衛將) 김인철(金寅哲)의 따님인데, 조카인 유성(有性)을 후사로 삼았다. 유성의 아내는 김계(金棨)의 딸로,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어리다.
도광(道光) 26년(1846, ) 7월에 세우다
손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일영(日榮)은 삼가 짓고,
손자 주부(主簿) 유성(有性)은 삼가 쓴다.
박명준(朴命浚) 『역과 방목』기사
상세정보 자료수정내역 [ 원문이미지보기 ] .[역과] 순조(純祖) 4년(180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4위(12/19)[인물요약]
초명 박명순(朴命淳)
자 유청(由靑)
생년 정유(丁酉) 1777년(정조 1)
합격연령 28세
본관 영해(寧海)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9명
품계 숭록대부(崇祿大夫)
관직 교회(敎誨)
관직 지추(知樞)
관직 총민(聰敏)
전공 왜학(倭學)
[가족사항]
[부]
성명 : 박치검(朴致儉)
품계 : 절충장군(折衝將軍)
관직 : 첨지(僉知)
전공 : 역과(譯科)
[조부]
성명 : 박춘대(朴春大)
[증조부]
성명 : 박창한(朴昌漢)
[처부]
성명 : 조상진(趙尙珍)
본관 : 배천(白川)
관직 : 상통사(上通事)
전공 : 청학(淸學)
[출전]
『역과방목(譯科榜目)』(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98])
<박명준 『조선왕조실록』기사>
헌종 5년 기해(1839,도광 19) 1월21일 (무오)
05-01-21[02] 계본을 거짓으로 꾸민 죄로 이의교·박명준·박명철을 처벌하다
이보다 앞서 재판왜(裁判倭)가, 관백(關白)이 승습(承襲)하는 일 때문에 도주(島主)가 섬에 돌아올 때까지 도주의 아들이 대신 일을 살피고 있다면서 와서 도해관(渡海官)의 행차를 청하므로, 도해관(渡海官)이 들어갔더니 도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상접(相接)하는 등의 모든 연례(宴禮)를 앞질러 경솔하게 거행하였다. 그래서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그 통역(通譯)을 맡은 무리들의 전도되고 그르치게 한 죄를 논한 장계(狀啓)를 닦아서 보냈는데, 그 장계가 경사(京師)에 이르자, 도해관의 형 이의교(李宜敎)가 훈도(訓導) 박명철(朴命澈)의 아들을 유도하여 중도에서 계본(啓本)을 돌려보내고 내용을 고쳐 지어서 그 죄를 늦추게 하려고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으므로,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하게 핵실(?實)하게 하였었다. 박명철의 형 박명준(朴命浚)과 이의교(李宜敎)가 실제로 그 일을 주무(綢繆)하였음을 아울러 자백하자, 판금오(判金吾)는 율(律)에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분하지 않는 조문(條文)이 있다는 데 의거하여 박명준·이의교를 아울러 대벽(大?)으로 처치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수범과 종범을 변별(卞別)하는 일이 없다고 의심하여 부경(傅輕)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이 무리가 국가(國家)를 업신여겨 죄범(罪犯)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조금 무겁게 하고 조금 가볍게 하는 차별을 두겠는가? 모두 일률(一律)을 적용해야 마땅하겠지만, 대신(大臣)들의 의논이 비록 나의 뜻과 다르다 하더라도 이를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박명준·이의교를 먼 악도(惡島)에 결장(決杖)하여 정배하고, 박명철은 동래부에 내려 보내어 그 죄를 세상에 알리고 엄중하게 형벌을 가한 후에 변원 정배(邊遠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원전】 48 집 461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외교-왜(倭)
[주D-001]부경(傅輕) : 죽일 죄(罪)에 의의(疑義)가 있을 때 그 죄를 경감(輕減)시켜서 목숨을 살려 주는 것. 부생(傅生).
[주D-002]악도(惡島) :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못한 외딴섬.
박흥식 관설당박제상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행정자치부 제46호 부정부패추방실천시민회 상임대표?
후원계좌 우체국 010777-01-002037
부추실 홈페이지 http://buchusi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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