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신문 60년 역사에는 많은 법조인들의 땀과 노력이 깃들어 있어요. 척박한 전문언론 환경에서 60년의 세월을 흐트러짐 없이 성장한 법률신문이 참으로 대견스럽게 느껴집니다.”
서울 종로구 당주동 변호사회관. 1994년 서초동 변호사회관에 그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대한민국 재야 법조계의 역사였던 곳. 그 곳 3층에 위치한 법무법인 대종에서 임갑인(88·일본고등문관시험) 변호사는 “법률신문은 잘 자라서 나타난 자식과도 같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에게 법률신문이 ‘자식사랑’에 버금가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985년 들어서면서 부터다. 고 이택규 회장이 법률신문을 인수할 당시 이 회장과 돈독한 인연을 쌓았던 임 변호사가 이사직을 맡게 되면서 법률신문과의 인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회장님과는 깊은 인연이 있었어요. 그 분이 부산지검 검사로 있던 1953년, 억울한 정치적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는데 제가 항소심 변호를 맡아 무죄를 이끌어 냈지요. 뿐만 아니라 60년대 초 법조계에서 벌어졌던 ‘법률신문살리기운동’에도 참여해 주주로 활동하게 됐어요. 그 인연이 깊어져 결국 법률신문 이사를 지내고 연이어 감사를 지냈으니 보통 인연은 아닌거죠.”
당시 법률신문은 심각한 경영분쟁에 시달렸다고 한다. 창간사주인 고 최대용 변호사시절부터 자금을 투자했던 비법조인 주주그룹과 십시일반 법률신문을 살리기 위해 참여했던 법조인 주주그룹과의 분쟁이었다.
“이 회장님의 가장 큰 고민이 그것이었어요. 비법조인 주주그룹은 법률신문이 상업지로 나가 수익을 올려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법조인 주주들은 상업성보다는 인권과 정의를 위한 법치주의 가치구현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회사결정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고 마찰을 빚으니 경영이 정상적으로 될 수가 없었어요. 이 회장님과 함께 비법조인 주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그들의 주식을 매집하는 과정이 참으로 고됐지요.”
임 변호사는 힘든 작업이었지만 보람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두가지를 얻었어요. 법률신문은 법조인들이 직접 만드는 법조인의 신문이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할 수 있었지요. 또 법률신문이 해야할 일은 상업적 성과를 내는 것 보다는 인권과 정의를 기준으로 법조의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원칙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법률신문이 내부적으로 경영권분쟁에 흔들리다 보니 법률신문과 유사한 매체들이 그 틈새를 비집고 우후죽순처럼 도전장을 내민 것도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또 당시 군사정권의 주간지 통폐합 압력을 이겨내야 하는 것도 주요 과제였다.
“사실상 법률신문이 제 궤도에 들어선 것은 80년대 중반부터라고 해야 할 겁니다. 전쟁 중 창간한 법률신문은 초창기부터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내재됐던 갈등들이 80년대 들어서면서 터져나오기 시작한거죠. 그런 문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 나가면서 오늘날 정도언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겁니다.”
임 변호사는 법률신문이 6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을 ‘정론직필(正論直筆)’에서 찾았다. “정론은 정당하고 이치에 맞는 주장을 말하는 겁니다. 직필은 정론을 써낼 수 있는 용기를 말하는 거죠.”
임 변호사는 법률신문의 정론직필이 앞으로 더 많은 도전에 맞닥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로스쿨출신 변호사의 대량 배출과 법률시장개방을 그 이유로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법률신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60년 역사를 가진 언론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논란의 핵심을 꿰뚫는 지혜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 지혜를 발휘해 혼란의 시기에 포퓰리즘에 흔들리지 말고 인권과 정의, 법치의 발전만을 생각하며 정론직필을 펼친다면 법률신문은 앞으로 다가올 60년 그 이후에도 법조계에 없어서는 안 될 등대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권용태 기자kwonyt@law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