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64)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새 대법관 후보 4명을 제청했지만 당초 예상보다 정치권과 여론의 반발 강도가 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현 시스템에서는 사회적 다양성을 반영해달라는 주문을 쉽게 반영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게 대법원의 해명이다.
실제로 이번에 제청된 후보자 4명에게 현저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야당이 주로 지적하는 것은 후보자 4명을 포함한 전체 대법관 12명의 조합이다. 재야, 여성, 학계 인물이 없는 판사 위주의 단순한 인적 구성이 문제다.
양 대법원장도 이런 비판을 예상치 못한 게 아니다. 지난해 9월 취임한 양 대법원장은 곧이은 대법관 제청에서 무명의 박보영 변호사를 발굴했다. 김용덕 법원행정처 차장과 함께였다. 민주당을 비롯한 각계에서도 일제히 환영했다. 정통 법관과 재야 변호사 조합이 괜찮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이 무렵 대법원에는 ‘장미조’가 꾸려졌다. 장미조는 장기미제사건처리조의 준말이다. 실력이 뛰어난 재판연구관을 차출해 미제 사건을 줄여 나갔다. 평소에도 16시간에 달하던 업무시간은 더 늘었다. 장미조는 변호사와 검사장 출신 대법관 취임 이후를 대비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이들이 적응하는 동안 사건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010년에 3만5168건을 처리했다. 대법관 1인당 2930건꼴이다. 주말을 제외하면 하루 평균 11건씩을 떼내야 하는 구조다. 대법관의 사건 처리를 돕는 재판연구관만 100명이 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장판사급인 이들은 엄청난 업무량에 시달린다.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검토 보고서를 만들어 올린다. 이런 과도한 업무량이 대법관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한 요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검찰 관계자는 “엄청난 업무부담 때문에 어지간해서 대법관은 엄두를 못내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양 대법원장도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양 대법원장이 누구보다 다양성을 원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대법원 사건부터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09~2010년 회기에 116건을 처리했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들이 삼세번 재판을 원하는 이상 미국처럼 사건을 줄이기가 어렵다. 미국은 상고를 허가하는 방식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사실 삼세번 재판과 대법관 다양화는 양립하기 힘든 요구”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아예 대법관을 수백명으로 늘리자는 주장도 있지만 이런 경우야말로 법률에만 능통한 법관들을 기용하란 얘기”라고 말했다. 대법원이 다양화하려면 사건수를 줄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1·2심에 정성을 쏟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평생법관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설명이다.
양 대법원장이 취임 직후 평생법관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런 이유라고 한다. 대법원이 수많은 개별 사건을 처리하는 사건 ‘해결소’가 아니라 사회의 방향을 정하는 토론기구로 가기 위한 절차라는 것이다.
현재 대법원 내부는 침울한 분위기다. 언론이 너무 사정을 몰라준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변호사들은 청문회를 두려워하고, 낮은 기수를 제청하려니 평생법관제도가 무색해지는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하급심 강화와 대법원 다양화를 이룰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