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사법부에 영향 미칠 듯
서울중앙지법에서 대형 사건을 도맡는 형사합의부 판사들이 지나치게 장황한 판결문 작성을 피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개선 방안을 마련 중이다.
그동안 갈수록 분량이 많아져 '형사 판결의 민사 판결화'라는 지적을 받아온 관행을 고치고, 국민과의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재판 당사자 중심의 간결한 판결문을 쓰자는 취지다.
전국 최대 규모인 중앙지법의 상징성에 비춰 이같은 자생적 노력은 앞으로 전체 사법부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더 뺄 것이 없는 판결문 지향 = 21일 법원에 따르면 중앙지법 10개 형사합의부 판사들은 최근 '형사합의 판결 작성의 합리화·적정화 방안'을 추진키로 뜻을 모았다.
당사자들이 다투지 않는 기초 사실을 과감히 제외, 핵심 쟁점에 대한 판단을 충분히 제시하되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압축된 판결문을 쓰는 것이 목표다.
이같은 시도는 수백 페이지짜리 형사 판결문이 잇따라 나온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과거 10년 이상 형사 사건을 심리한 황찬현 원장이 중앙지법에 부임한 뒤 물 밑 논의가 더욱 활발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2002~2003년부터 유죄 이유를 길게 쓰기 시작하면서 형사 판결문이 점차 길어졌다"며 "사건이 복잡해지기도 했지만, 상급심에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고 전했다.
서울고법의 다른 부장판사는 "판결문이 장황해지니 '옥에 티' 같은 실수가 생겨 신뢰도가 떨어지고, 항소심에서 쓸 데 없이 쟁점이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사건 주심을 맡아 재판부 합의 후 직접 판결문을 작성하는 배석판사의 '살인적인' 노동 강도까지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배석판사는 "매주 거의 5일 재판을 하니 새벽 서너 시까지 남아서 판결문을 쓰기 일쑤"라며 "간이화가 곧 합리화라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 전국 법원에 영향 미칠 듯 = 중앙지법은 이미 1년차 재판장과 2년차 재판장이 있는 형사합의부 2곳을 시범 재판부로 지정, 핵심 쟁점을 압축적으로 담은 판결문 작성에 공들이고 있다.
또 최근 나온 판결문 가운데 분량이 유난히 많았던 2건을 선정해서 심층 분석하도록 했다.
해당 판결문은 기록 검토에 숙련된 판사가 읽더라도 꼬박 한나절이 걸릴 정도로 방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지법 형사합의부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을 완전히 장악해서 쟁점을 모두 소화한 후에야 비교적 간결한 판결문을 쓸 수 있다"며 "오히려 장황하게 쓰는 게 쉽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다른 부장판사는 "수백 페이지나 되는 판결문을 다시 읽으면서 한숨이 푹푹 나왔다"며 "당사자들이 굳이 다투지 않는 사실까지 시시콜콜하게 언급하는 것은 낭비 같다"고 평가했다.
중앙지법은 이런 노력을 거쳐 오는 7월 열리는 상반기 전국 형사법관회의에서 의제를 공론화할 예정이다. 과거 사례로 미루어 전체 사법부에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일반 법원 안팎의 반응은 긍정적인 편이다.
한 중견 변호사는 "재판부가 장황한 판결문 작성보다는 치밀한 심리와 판단에 에너지를 쏟았으면 한다"며 "정제된 판결문 작성을 위해 공판에서부터 변화하는 모습을 기대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