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21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사연구회 주최로 서울 연세대 학술정보원에서 열린 '청일전쟁·동학농민혁명과 21세기 동아시아 미래 전망' 국제학술회의에서 갑오군정실기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양호도순무영은 1894년 9월22일 호위부장 신정희가 도순무사(都巡撫使)를 맡아 12월27일까지 95일간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운용한 특별 지휘부였다. 지금의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에 설치됐다.
배속 인원은 526명으로, 신정희를 포함해 호위청, 통위영, 장위영, 총어영, 용호영, 경리청 등 중앙군인 경군(京軍)의 각 병영이 모두 동원됐다. 이들 지휘부 휘하에서 진압작전에 투입된 장졸은 2천501명으로 기재됐다.
전국에서 농민군과 전투하던 경군 각 병영 파견군의 전투보고, 각 도의 감영과 군현에서 올리는 군사첩보와 진압 관련 보고의 종착지도 도순무영이었다. 특정 작전의 지휘부로서 도순무영의 이같은 규모와 체제, 성격으로 미뤄 조선 정부가 농민군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고 신 교수는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위상에도 도순무영의 실제 전투력은 별반 크지 않았다. 농민군 규모와 비교하면 적은 병력이었고, 일본군이 신식 무기를 탈취해 가는 바람에 화기도 변변찮았다. 적절한 작전계획이 없었고, 병력을 여러 지역에 파견하면서 군량 등 지원물자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한계도 있었다.
진압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그해 12월23일 지휘관 신정희는 강화유수로 인사조치되고 4일 후 도순무영은 해체된다. 그 배경에는 일본의 내정간섭이 있었다. 지휘부의 핵심이었던 신정희와 선봉장 이규태가 일본 측에 내내 껄끄러운 존재여서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공사가 압력을 넣은 결과라는 것이 신 교수의 설명이다.
갑작스럽게 폐지되다 보니 도순무영의 조직과 활동 전반을 기록한 공식 문서는 제대로 작성되지 못했다. 그러다 2011년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 도서 1천205책이 반납됐고, 그에 포함된 갑오군정실기가 양호도순무영에 관한 기록임을 확인한 신 교수가 내용을 분석해 이번에 공개했다.
신 교수는 "갑오군정실기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각 지역의 새로운 사례를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라며 "1894년의 국내 상황을 넓게 볼 수 있는 국내 사료로는 이 이상 가치있는 것을 더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학술회의에서는 '일본 코리아협회· 에히메'의 야나세 가즈히데 사무국장이 동학농민군 섬멸의 중심이었던 후비보병독립제19대대에 관해 기록과 유족을 조사한 내용, 일본 내에서는 은폐된 당시 섬멸작전의 참상에 관한 이노우에 가츠오 홋카이도대 교수의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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