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기업과 금융회사 등이 준법경영을 위해 로펌에 의뢰해 받은 법률자문 내역을 털고 제재 근거로 삼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어 논란이 커지고 있다. 기업의 방어권과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과잉 조사라는 비판과 함께 조사 방식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법조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25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공정위와 금감원은 최근 기업의 불공정거래 행위와 자본시장법 위반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벌이면서 기업의 현업 부서보다 법무팀을 먼저 찾아 현장조사를 벌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담당부서 이전 법무팀 방문
자문의견서 제출요구
한 대기업 사내변호사로 일했던 변호사는 "공정위에서 조사를 나오면 법무팀 컴퓨터부터 열고 자료를 찾는 것이 마치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며 "법무팀은 회사의 내밀한 정보를 다룰 뿐만 아니라 로펌으로부터 받은 의견서 등을 보관하고 자체적으로 법률의견서를 작성하기 때문에 '여기를 털면 뭔가 나오겠구나'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본시장 분야 전문가인 한 변호사는 "공정위 뿐만 아니라 금감원도 금융사에 검사를 나와 최근 3~5년 동안 로펌에 지급한 자문료 내역과 로펌으로부터 받은 의견서 목록부터 제출하라고 한다"며 "예컨대 은행법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인데 '은행법 위반 여부 검토'라고 적힌 의견서 제목이 목록에서 보이면 해당 의견서를 달라고 해 자료를 확보하는 식"이라고 했다.
공정거래 분야 전문가인 한 변호사는 "기업으로부터 자문 의뢰를 받은 로펌으로서는 법 위반 소지가 경미한 사안일지라도 기업에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개선·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보수적인 답변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공정위에서는 이를 '법 위반 소지가 있음을 회사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고 해석해 제재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잦아 큰 일"이라고 지적했다.
컴플라이언스 업무 위축
변호사 조력권 침해 우려
실제로 지난해 12월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실트론 사익편취 사건에서 공정위는 SK가 모 로펌으로부터 받은 법률자문 내용을 증거로 최 회장이 공정거래법 위반 소지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2020년 1월에는 금감원이 시중 은행들에게 로펌 자문내역 제출을 요구해 '검사권 남용' 논란이 일기도 했다.
통상 로펌은 기업 등 클라이언트들에게 의견서를 전달하면서 '작성자의 동의 없이 제3자의 열람이나 제3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조건을 단다. 하지만 공정위 등 조사기관이 현장에서 기업 측에 집요하게 이들 문서에 대한 제출을 요구하면 기업들은 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공정위의 조사 때 피조사자가 현장 자료 제출 요구를 거부하거나 자료를 은닉·폐기해 조사를 기피하면 공정거래법 제125조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도 있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공정위의 자료 제출 요구에 로펌 측에서는 '안 된다'며 끝까지 버텼지만, 야간까지 이어진 끈질긴 조사에 기업 측이 버티지 못하고 의견서를 줘버린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대형로펌 변호사는 "사업 인·허가 권한까지 쥐고 금융회사에 상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금감원의 요구를 '방어권을 보장해달라'며 거절할 수 있는 회사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금융기관 검사 및 제재에 관한 규정 제8조의3은 금감원의 현장검사 과정에서 검사를 받는 금융기관 임직원은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론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다.
문제는 이 같은 조사 관행이 기업들의 정상적인 컴플라이언스 업무를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방어권은 물론 변호사 조력권까지 침해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영장 없이 사실상 자료 수집하는
조사관행도 문제
기업 법무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변호사는 "기업 법무팀은 법에 저촉되는 사안이 발생하지 않도록 로펌에서 받은 자문 결과를 바탕으로 법률리스크를 최대한 줄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것이 준법경영으로 가는 길이라 믿고 있다"면서 "그런데 공정위는 '로펌에 담합 소지 여부에 대해 자문까지 받았으면서 담합 행위를 했다'는 식으로 오히려 과징금을 증액한다. 이는 기업에 '돈 들여 로펌에 자문 받아도 우리 책임만 무거워지니 차라리 자문을 받지 말자'는 잘못된 시그널을 주고, 컴플라이언스 업무를 위축시킨다"고 비판했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이런 식의 조사 관행이 이어지다보니 기업에서 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내용이 담긴 의견서는 회사 메일이 아닌 개인 메일로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그런 의견서라면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 난감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영장도 없이 사실상 기업의 모든 자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공정위와 금감원의 조사 방식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한 변호사는 "형사사건에서 검사는 피의자가 보관 중인 법률의견서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야만 압수할 수 있다"며 "이런 원칙이 공정위와 금감원 조사 및 검사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 같은 조사 관행은 헌법상 보장된 변호사 조력권 등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므로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