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초월하여 살다간 실학의 산실...
한 시대를 초월하여 살다간 실학의 산실,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85-2 다산 유적지를 찾아보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762년(영조38년) 6월 16일(음력) 정재원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1776년(15세)에 풍산홍씨 홍화보의 따님과 혼인을 하고,서울에서 살면서 16세에 이승훈, 이가환 등과 만나면서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고서 실학에 뜻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전라도 화순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과거공부를 계속하게 되고 그의 나이 22세(1783년)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그후 큰형(악현)과 처남인 이벽으로 부터 천주교에 관한 말을 듣고서 큰 감명을 받고 천주교에 빠져들게 되고, 28세(1789년)에 문과 시헙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선생은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이되어 31세때 수원하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녹로 등을 고안하여 축성공사비를 절약하고 공사 기간도 7년이나, 단축 시키는 업적을 쌓고, 33세때는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아가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수령의 비정함을 고발하기도 한다.
선생의 36세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상소를 올려 천주교와는 거리를 두었음을 밝힌다. 그 후 황해도 곡산 부사로 제주되어 목민관으로서의 인격과 능력을 보이고, 38세에는 3농정책을 밝히고 '응지론농정소'를 올리게 되고, 39세인 1800년(기묘년) 봄 고향으로 돌아와 당호(堂號)를 여유(與猶)라 하고 은둔를 하게 되고 그해 여름 정조가 승하 하였다는 소식를 접하고 슬퍼하게 된다.
▲ 정약용 선생 생가 다산 선생 40세인 1801년(신유년) 2월, 책롱사건으로 다산의 3형제가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투옥이 되면서 시련이 시작이되고 셋째형 약종은 사형을 당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러던 그해 10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 다시 서울로 압송이되어 조사를 받고, 11월에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또 다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다산의 거처를 '사의재'라 이름하고, 훗날 보은 산방과 이청의 집에서 지내다 47세 되던 해(1808년) 봄, 처사 윤단의 산정(다산초당)으로 옮겨, 이곳에서 10년을 보내며 다산학을 이룩하고, 55세(1816년)때 나주 율정에서 생이별한 둘째형 약전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었다는 소식를 접하게 된다.
다산를 구하고자하는 해배가 몇 차례 움직임이 있었으나, 반대파에 의해서 저지되다 마침내 57세되던 해(1818년)8월에 이태순의 상소로18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9월 초에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게된다 그리하여 다산은 해배를 전후하여 '경세유포',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완성하게 된다.
그후 다산은 58세 가을 용문산을 59세때는 춘천 천평산을 유람하며 61세 회갑을 맞아'자찬묘지명'을 짖고 봄에 대산 김매순과 경의에 관해, 여름에 석천 신작과 주례에 관해 토론하면서 지내다 75세때인 (1836년)2월22일 고향(마재) 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해 4월1일, 고향집 뒷동산에 안장이되고 1910년 (순종4년) 7월18일 정이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이 되고 시호를 문도(文度)라고 하였다.
이렇듯 다산 정약용 선생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떠났지만은 후세길이 실학과 학문, 목민관이는 존경과 귓가에 들려온다.
이번 취재를 위해 도와주신 박물관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0-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