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
서브비주얼

문화

  • 사진
    작가 박문영씨 주도로 덕수궁에서 개최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 황제 추도식이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열렸다.고종 황제 91주기를 맞아 열린 이날 추도식은 최근 고종 황제에 대한 소설 ‘황제-제국의 부활’(전3권)을 쓴 작가 박문영씨가 주도했으며 고종 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69) 황실보존국민연합회 회장과 황실문화재단,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추도식이 열린 함녕전(보물 제820호)은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준 고종 황제가 거처하다 91년 전인 1919년 1월21일에 승하한 곳이다.박씨는 “소설을 집필하면서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부정적인 이미지로 알려졌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제까지 추도식이 열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했다”고 추도식을 연 배경을 설명했다. 이 회장은 추도사에서 “당신께서는 제국과 신민을 구하시려고 애를 쓰시다가 1919년 오늘 이 자리에서 독살당하셨습니다. 오늘날 당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패와 무능으로 나라를 망친 왕이라는 욕된 소리만 난무하고 있습니다”라면서 “지혜로운 한국인들이 당신의 가치를 알아줄 날이 머지않아 곧 오리라 굳게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고종 황제의 기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안타깝다”면서 일본 정부에 고종 황제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관련 기록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조정진 기자
    2010-01-22
  • 사진
    KBS '역사스페셜' 16일 방송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 주몽을 '동명성왕'이라 칭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도 주몽과 동명왕은 대체로 동일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고구려 때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시조 주몽이 '추모성왕'으로 기록됐다. 또 '위략'과 '후한서' 등 중국의 고대 역사서는 동명왕을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건국 시조로 기록한다. KBS '역사스페셜'은 16일 오후 8시 '동명(東明) 루트를 찾아서'에서 부여의 건국 시조로 그려진 동명왕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역사서를 보면 부여는 전성기 때 인구 8만호에 사방 2천리의 영토를 가진 큰 나라였다. 당시 인구 3만호에 불과한 고구려보다 국력이 훨씬 강대한 나라였다. 또 한반도에서 청동기 유물인 세형동검을 사용할 때, 부여는 수준 높은 철제 무기를 사용한 군사 강국이었다. 건국 신화에 따르면 부여를 세운 동명왕은 '탁리국'에서 남하해 '엄호수'를 지나 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프로그램은 '탁리국'과 그의 남하 루트를 찾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부유현에서 송화강을 건너 길림까지 약 3천㎞를 탐사해 그가 걸었던 자취를 추적한다. 또 고구려 주몽이 부여 동명왕과 동일시된 것은 고구려가 부여 동명의 건국신화를 차용해 부여를 계승하는 의식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소개한다. 실제로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도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칭했으며, 가야와 발해는 자신들의 뿌리가 부여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프로그램은 전한다. comma@yna.co.kr
    2010-01-15
  • 사진
    허난성서… 고고학자 “60대 남성 유골이 조조”
    위나라 무왕’ 등 명문 포함 유물 250여점 출토 중국 고고학자들이 삼국시대 위나라를 세운 조조(曹操·155~220)의 진짜 무덤을 중부지방 허난성에서 찾아냈다. 촉나라의 유비, 오나라의 손권과 함께 천하를 다투었던 조조는 죽기 직전 자신의 장례를 간단히 치르고, 봉분 등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유언해 그의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1000년의 미스터리’였다. 중국 허난성 문물국은 27일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고고학자들의 조사 결과 허난성 안양현 안펑향 시가오쉐촌에서 발견한 동한시대 무덤이 조조가 묻힌 ‘고릉(高陵)’임을 최종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고고학자들은 무덤에서 발견한 ‘위나라 무왕이 자주 쓰던 창’ ‘위나라 무왕이 자주 쓰던 칼’이라는 명문과 유골 등을 통해 조조 무덤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조는 생전에는 ‘위나라 무왕’이라고 했다가 사후 아들 조비가 위나라 황제로 등극하면서 ‘위나라 무황제(위무제)’로 추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무덤에서 60대 남성 1명의 유골과 40대와 20대 여성의 유골을 발견했으며, 남성 유골이 바로 65세에 세상을 떠난 조조 유골이라고 밝혔다. 조조의 무덤은 갑(甲)자와 같은 형태로 동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묘도와 전·후실, 그리고 4개의 측실로 이뤄져 있다. 묘도는 길이 39.5m, 폭 9.8m였고, 가장 깊은 곳은 지하 15m였다. 무덤은 동쪽은 가로 22m, 서쪽은 가로 19.5m, 동·서쪽 무덤 사이 길이는 18m였다. 무덤 전체 면적은 740㎡였다. 조조무덤에서 발굴된 조조임을 보여주는 명문들. 조사단은 철로 만든 갑옷, 옥구슬, 마노구슬 등 250여점을 수습했다. 이 가운데 ‘위나라 무왕’이라는 글자가 적힌 명문 59점이 조조의 무덤임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허난성 문물국은 이번 발견을 계기로 묘지 배치와 건축물 조사 등을 추가로 마친 뒤 무덤을 보존해 영구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허난성 문물국은 이 무덤이 2004년부터 여러차례 도굴되자 지난해 12월 국가문물국의 허가를 받아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벌여왔다. 홍인표 선임기자 iphong@kyunghyang.com
    2010-01-04
  • 사진
    MBC 일일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해리(진지희 분)는
    MBC 일일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해리(진지희 분)는 정신분열증?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이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빵꾸똥꾸’사용에 대해 권고조치를 내린 것과 관련해 “(극중 해리가) 정신분열증에 걸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 의원은 지난 23일 오후 CBS 라디오 ‘시사자키 양병삼입니다’에 출연해 막말방송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 해리 캐릭터에 대해 “늘 인상을 쓰고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어른에겐 지독한 욕설을 퍼붓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특히 ‘빵꾸똥꾸’라는 용어에 대해 “아마 작가가 지어낸 말인 모양인데, 그냥 세상에 있는 욕설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이렇게 과장된 말을 창조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에 진행을 맡은 양병삼 PD가 “‘시트콤을 전개하다보니 흐름이나 맥락상 아역 해리 캐릭터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봐야지 극중 대사 한 토막을 가지고 문제삼는 건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다”고 하자, 최 의원은 “욕설로 일관되고 비정상적인 아이를 가지고 하는 것이 어떻게 방송을 완성시킨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 ‘어떤 제재가 필요하다고 보나’라는 질문에는 “이런 프로그램은 나오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방통위의 권고조치에 대해 “권고라는 건 아무런 제재가 되지 못한다”며 “제재하는 것이 너무나 약하다”고 말했다. 이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최 의원의 홈페이지에는 항의가 쏟아지고 있다. 앞서 방통위는 ‘지붕뚫고 하이킥’의 해리의 “빵꾸똥꾸”란 대사와 관련해 일상적인 반말 사용과 어른에 대한 버릇없이 행동, 폭력적인 언어 사용 등을 지적하며 권고조치를 내린 바 있다. 한편 YTN 이종구 아나운서가 방통위의 권고조치를 전하던 중 웃음을 터뜨린 동영상은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2009-12-27
  • 사진
    걸그룹 애프터스쿨의 유이가 클럽 공연 중 성희롱 당한 경험고백
    걸그룹 애프터스쿨의 유이가 클럽 공연 중 성희롱 당한 경험을 깜짝 고백했다.유이는 19일 방송된 MBC <세상을 바꾸는 퀴즈>(이하 세바퀴)에 출연해 직장내 성희롱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나도 클럽에서 그런 경험이 있다”고 고백했다.유이는 “클럽에서 공연을 자주하는데 무대 의상이 굉장히 짧은 편이다. 그날도 짧은 옷을 입고 공연을 했는데 공연을 마치고 내려가던 중 손님 중 한 명이 고의적으로 허벅지를 만졌다”고 말했다.이어 “실수로 스친 게 아니라 일부러 만진 것”이라며 “이후에 자기들끼리 ‘꿀벅지’라고 이야기하며 웃더라”라고 당시 상황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다.함께 방송에 출연한 이수영도 “학생 시절에 두발 검색을 하던 중 선생님이 직접 머리카락을 넘기며 귓볼을 만지는 경우가 있었다”며 공감했다.한편, 이날 유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키워온 수준급 댄스스포츠 실력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또한 같은 팀 멤버 가희는 비욘세의 ‘스위트 드림스’에 맞춰 파워풀한 섹시 댄스를 선보여 ‘세바퀴’를 뜨겁게 달궜다.<경향닷컴>
    2009-12-20
  • 사진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펴낸 신운용 안중근연구소 연구원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한국(각국) 독립’과 ‘동양(세계) 평화의 구현’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은 종교적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본격 연구서인 <안중근과 한국근대사>(채륜)를 최근 펴낸 신운용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43)은 안 의사의 의거 동기에 깔린 사상적 배경을 천주교의 천명(天命) 사상에서 찾았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 유지라는 당대의 역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을 천주교에서 찾았다는 주장은 안 의사 의거의 사상적 배경이 주로 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통념과는 대비되는 해석이다.신 박사는 “안 의사는 신부들의 권위적인 태도 등 천주교 내부의 모순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종교와 민족 문제를 동일한 궤도에서 일치시켜 역사 문제를 실천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안 의사가 일본 사회 내의 평화세력과 침략세력을 구분해서 보는 등 대일 인식이 적대감 일변도로 흐르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종교관 때문이라고 신 박사는 분석한다. 신 박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침략세력, 민을 중심으로 한 평화세력으로 일본을 구분하는 분석적인 대일 인식의 바탕에는 천명이라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안 의사의 이 같은 세력 구분은 1908년 의병들의 국내 진공작전 당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천황의 뜻을 어기고 멋대로 권세를 주물러서 일본과 한국의 귀중한 생명을 무수히 죽였음에도 편안히 복을 누리는 이토에 대해 분개하는 마음이 있다”는 이유로 풀어준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 박사는 “안 의사의 이런 점은 일본 평화세력의 성장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그러나 안 의사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충실한 군주관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때문에 그는 일본 천황에 대해서도 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조선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일본 천황 역시 천주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최익현과 같은 강직한 유생을 포함해 당대 지식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계이기도 하다. 신 박사는 “이봉창 열사가 천황 폭살 시도를 한 1932년에 가서야 이러한 인식이 관념을 넘어 행동으로 완전히 극복됐다”고 말했다. 결국 안 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사상적 배경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학을 바탕으로 한 천주교 사상”이 된다. 신 박사는 또 “(이는)천주교 토착화의 좋은 사례”라고도 지적한다. 세계적으로 보수적 종교로 평가되는 천주교가 유독 한국에서는 개혁적 이미지로 인식되는 것은 1974년 만들어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덕분인데, 그 뿌리는 다시 천주교를 조선식으로 토착화한 안 의사에 있다는 것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안 의사의 정체성은 동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도 확인된다. 역사를 “권력 관계의 해체과정”으로 정의하는 신 박사는 “성리학 중심의 권력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이행하는 조선 후기에 동학은 한국근대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듯했지만 지배층과 외세의 협공으로 그 싹이 잘려버리는 바람에 주체적 권력관계의 형성이 가로막혔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안 의사가 지배층, 외세에 동조했던 것은 아니다. 성리학적 권력의 해체기에 비록 동학을 부정적으로 보긴 했지만, 안 의사는 “불의한 권력의 출현에 저항하면서 평화를 중심으로 한 권력관계의 형성을 역사 전면에 내세운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안 의사 의거 및 순국 100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지만 학계 안팎에서 안 의사에 대한 이해는 이토 저격이라는 사건 자체에 국한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제국주의의 이론으로 ‘평화’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던” 안 의사의 사상적 배경은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15년째 안 의사 연구에 매달리고 있는 신 박사는 안 의사에 대한 심도 깊은 본격적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강조한다.<글·사진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2009-12-13
  • 사진
    57년 도시정비 복개때 사라져 반세기만에 다시 드러난 석축
    현대식 물길 낸다고 도로 덮어 서울시가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백운동천·중학천 물길 조성사업이 초기부터 논란을 낳고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 결과 중학천에서 조선시대 석축이 발견됐지만, 해당 지역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물길 조성공사를 진행 중이다. “‘복원의 허울을 썼을 뿐 개발주의의 산물’로 비판받는 청계천 복원공사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도 따른다.청계천의 상류인 백운동천과 중학천은 경복궁의 동·서편을 흐르는 역사적 물길이다. 하지만 1957년 도시 정비 및 교통 편의의 목적으로 복개된 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37년 도심정비 목적으로 청계천을 덮기 시작했던 일본식 개발주의의 연장선상이었던 셈이다.문화재 발굴 전문기관인 한울문화재연구원은 지난 8월28일부터 10월16일까지 중학천 지역을 발굴조사한 결과, 복개된 땅 아래에 잔존하던 조선시대 장대석 호안석축(물가에 돌로 쌓은 벽)과 일제강점기 견치석 호안석축을 발견했다. 조선 전기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생활 유물들인 자기와 도기, 와편(기와조각) 등 다양한 유물들도 출토됐다.그런데 지난 9월22일 열린 지도위원회에서는 “다시 잘 복토해 물길 하부에 보존될 수 있도록 한다”고 정리했다. 이 결과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최종규 한울문화재연구원 전통연구실장은 “완전한 복원을 하려면 많은 시간과 막대한 예산이 들 것”이라며 “문화재적 가치는 있으나 (물길) 구조물들이 하중을 주지 않기 때문에 유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복토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중학천은 사라지고 현대식으로 조성된 새 물길이 나게 된 것이다. 결국 흙더미에서 숨쉬던 석축과 유물들은 잠깐 모습을 드러냈지만, 국민에게 공개되지 못한 채 무모한 개발에 의해 다시 흙 속으로 사라졌다.청소년 문화보호단체인 달항아리 문화학교의 박동 교사는 “50여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중학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며 “서울시는 당장 공사를 중단하고 복원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백운동천이 이어지는 지역도 문화재 손실이 우려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 옥인동 등 서촌 일대인 이곳은 이상, 이중섭, 이상범 등 예술가들의 집터가 남아있어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은 지역이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골목 하나, 길 하나가 문화유산인 서촌 지역이 물길 조성공사로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우려했다.그러나 서울시는 백운동천·중학천 물길 조성으로 “광화문광장, 청계천 등과 더불어 역사와 문화 관광의 도심공간이 창출돼 수도 서울의 브랜드 가치가 향상되고, 1200만 관광객 유치를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600년간 도읍을 유지한 서울은 그 자체가 문화재다. 최근 서울시내에서 실시된 발굴조사마다 보물급 문화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맛골인 종로 청진지구에서 명기 백자가 출토됐고 서울시 신청사 건립부지에서는 보물급 유물인 불랑기자포 1점이 출토됐다. 아직도 곳곳에 대량의 문화재가 매장돼 있다. 이 땅에 숨어있는 유물들은 세상과 만나야 한다. 역사의 진실찾기는 우리의 가장 고귀한 숙제 아닌가.<이고은기자 freetree@kyunghyang.com>
    2009-12-05
  • 사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 기능보유자 신응수씨는.....
    27일 전면 가림막으로 가려진 광화문 복원현장. 지상에서 15m 높이에 설치된 건축 구조물 위에 광화문 상량(上粱)식을 위한 제단이 차려졌다.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고종 때 중건 당시 모습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상량식이 144년만에 열렸다. 상량식은 목조 건축에서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리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제례 보존회 회원들이 의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상량문 봉안(奉安) 의식을 거행했다. 축문을 읽고 잔을 올리며 절을 하는 등 의식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30분 가까이 진행됐다.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상량문을 넣은 들보인 장혀 올리기였다. 봉안관으로 참석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예가인 김양동 계명대 서예과 석좌교수가 한지에 글씨를 쓴 상량문을 함에 넣고 뚜껑에 힘차게 못질을 했다.상량문을 담은 함은 8.5m 길이의 장혀에 팬 홈에 들어갔다. 유인촌 장관과 이건무 문화재청장 등 관계자들은 기중기의 도움을 받아 천을 당겨 장혀를 나무로 만든 지붕 뼈대 위에 얹었다.참석자들의 우렁찬 박수 속에 장혀가 올라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장혀 위에 원통형 마룻대를 올리고 목수들이 나무망치로 마룻대를 때려 튼튼하게 고정하는 것으로 상량은 마무리됐다.광화문 복원 작업을 지휘한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 기능보유자 신응수씨는 "이제 상량을 했으니 목조 작업은 80%가 끝난 것이다. 이제까지 작업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구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면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경복궁 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종 때 모습 그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유인촌 장관은 "경복궁의 얼굴인 광화문이 가려져 있어 많은 국민이 궁금했을 것으로 안다. 비뚤어진 광화문을 바로잡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비틀어진 것을 바로 세우는 작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앞으로 추녀와 서까래 설치, 지붕 기와 잇기, 단청 등을 거쳐 내년 10월 광화문 복원은 대장정을 마무리한다.조선 태조 4년(1395)에 경복궁의 정문으로 지어진 광화문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2차례 소실되고 1968년 중건될 때 원래 위치에서 옮겨지고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수난을 당했다.
    2009-11-28
  • 사진
    김흥규·윤선태 교수 논쟁과 윤선태 “일 역사학자 담론 발명해 계승”
    ‘통일신라’를 둘러싼 역사 논쟁이 점입가경이다. 김흥규 고려대 교수가 지난 9월 계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쓴 ‘신라통일 담론은 식민사학의 발명인가’라는 글이 도화선이었다. 여기서 김 교수는 오늘날 통용되는 통일신라 담론이 일본 근대 역사학의 도움으로 ‘발명’됐다는 윤선태·황종연 동국대 교수의 주장에 대해 “근대와 식민주의를 특권화하고 역사 이해를 부당하게 단순화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당사자 중 한 명인 윤선태 교수가 이번주 발간된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서 김 교수 글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다. 그런데 양쪽의 공방이 실증과 논리에만 의존해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 개운찮다. 오독과 과장에 의도적인 뭉개기, 모멸감을 주려는 듯 잔뜩 비틀고 날을 세운 언어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탓이다. 문제가 된 ‘통일신라 발명론’은 윤 교수가 2007년에 쓴 ‘통일신라의 발명과 근대역사학의 성립’에서 개진한 주장이다. 핵심은 삼국통일의 완수 시기를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때(676년)로 보는 오늘날의 통일신라 담론이 일본 역사학자 하야시 다이스케가 1892년에 쓴 <조선사>(朝鮮史)에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구한말의 국사 교과서에 수용된 뒤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 사학에 계승되면서 오늘날의 공식 역사해석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윤 교수가 볼 때 하야시의 주장은 신라의 통일 시점을 백제·고구려 멸망기(668년)로 설정했던 한국의 전통 역사서에 견줘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한반도의 첫 통일국가가 ‘중국이라는 타자’와의 대결 속에서 성취됐다는 상상의 여지를 열어줌으로써 ‘국민’ 형성의 기초가 되는 공통적 역사인식의 원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야시는 왜 이런 담론을 ‘발명’했을까. 윤 교수는 이것이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추구했던 당시 일본의 아시아연대주의와 연결돼 있을 것이라고 본다. 김 교수는 이런 윤 교수의 주장이 하야시의 역사 기술에 대한 과잉 해석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본다. 하야시가 삼국 통일에 대해 기술한 대목 어디에도 ‘신라가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통일을 완수했다’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김 교수는 통일 과정에 대한 하야시의 기술은 나당의 대립을 ‘전쟁’이 아닌 ‘소규모 충돌’로 묘사하면서 신라의 영토 점유를 적극적 투쟁이 아닌 절취의 결과로 축소하고 있으며, 내용 자체도 <삼국사기>를 차용한 것으로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같은 후대의 역사서에 반복해서 등장한다고 역공한다. 실제 윤 교수가 인용한 <조선사>에는 신라의 통일 과정에 대해 나당이 연합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이 그 땅에 도독부를 설치했지만 신라가 점점 백제 땅을 취하고 고구려 반중(叛衆)을 거둬들여” 당의 분노와 침략을 초래했고, “신라 왕이 거짓으로 사과하나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한 것이 전부다. 어디에도 ‘신라의 승리’나 ‘통일’의 완수 시점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는 말이다. 윤 교수는 이런 비판에 대해 “김흥규는 역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전혀 모른다”며 격한 감정을 드러낸다. 통일에 대한 하야시의 기술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후대의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기술과 같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해석에선 김부식이나 다른 사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부식 등이 “사대질서에 함몰된 유학자였기 때문에 나당전쟁의 승리를 통해 삼국통일이 완성되는 것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에 항거했기 때문에 통일의 공훈마저 망치게 됐다고 비판”한 반면, 하야시는 당 세력의 대척점에 신라뿐 아니라 백제·고구려의 유민까지도 포착해 배치함으로써 전혀 다른 상상에 기반한 새로운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게 윤 교수의 해석이다. 결국 쟁점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신라가 당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통일이 달성됐다는 오늘날의 “자명한” 삼국통일 담론이 대체 언제 처음 등장했느냐는 것이다. 김 교수는 “삼국통일 담론이 7세기 말의 신라에서 형성돼 조선후기까지 여러 차례 재편성과 전위 과정을 거치면서 동적으로 존속해왔다”고 이야기할 뿐, 현행 국사 교과서의 ‘당 축출 기점론’이 구체적으로 언제 등장했는지에 대해선 침묵한다. <조선사>가 최초라는 윤 교수 주장도 불완전하긴 마찬가지다. 하야시가 ‘백제·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통일’을 별개의 장으로 분리해 기술했다는 사실, <조선사>의 집필에는 “아시아연대주의의 영향 아래서, 조선을 청국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당시 일본 지식인의 굴절된 희구가 담겨 있다”는 윤 교수의 추정 말고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뚜렷한 근거가 눈에 띄지 않는 탓이다. 물론 적극적인 분발이 요구되는 것은 김 교수 쪽이다. 어찌됐든 윤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정황 증거는 제시한 셈이기에, 확실한 반증을 통해 그의 오류를 증빙해야 할 책임은 처음 문제를 제기한 김 교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2009-11-23
  • 사진
    청와대 앞에서 'MB특보 낙하산인사 반대' 기자회견을 연다!
    차기 사장 선임을 앞둔 KBS가 혼란스러운 분위기다. KBS 이사회가 19일 면접을 통해 KBS 차기 사장을 선임할 예정인 가운데 KBS 노조와 KBS PD협회, KBS 사원행동 등이 '낙하산 사장 반대', '이병순 사장 연임 반대' 등을 요구하며 강경 투쟁 의지를 밝히고 있다. KBS 노조는 17일 오전 이사회가 차기 사장 최종 후보 선임 방식을 논의하는 KBS 신관 이사회 앞에서 '공개면접 쟁취'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이날 오후 3시에는 청와대 앞에서 'MB특보 낙하산인사 반대' 기자회견을 연다. 이어 오후 6시부터는 집행부를 중심으로 '정치적 독립 사장 선임'을 요구하는 무기한 밤샘농성에 돌입할 예정이다. 또한 김덕재 KBS PD협회장은 이날부터 '이병순 연임 저지 및 낙하산 사장 선임 반대'를 위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런 가운데 각 사원 단체끼리 의견 차로 인해 내분 양상도 보이고 있다. 이들은 KBS 사장후보추천위원회가 이사회에 추천한 5명의 사장 후보자 중 이병순 현 KBS 사장, 김인규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장, 강동순 전 KBS 감사 등 3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 의견을 밝히는 점에서는 비슷한 입장이다. 하지만 3명 중 최우선으로 반대하는 후보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KBS 노조는 김인규 회장이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활동한 경력을 들어 지난 12일 "MB 낙하산 김인규 씨가 오면 총파업으로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KBS PD협회는 "특보출신 낙하산도 막아야 하지만 조합의 이름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다수 조직구성원들이 반대하는 인사, 이미 그 능력의 한계를 보여준 이병순의 연임도 당연히 저지해야 한다"며 이병순 사장의 연임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KBS 사원행동도 노조가 김인규 회장에 대해서만 총파업을 결의한 것을 비난하며 "노조의 성명서 어디에도 나머지 2인(이병순, 강동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 성명서를 두고 사내외에서는 노조가 가장 유력한 낙점 후보인 이병순 현 사장이 연임하는 것에 대해서는 눈 감겠다는 의미로 행간을 읽고 있다. 이에 사원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이들은 엇갈리는 입장 속에서도 결과에 따라 저마다 다각도의 투쟁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KBS 차기 사장 선임의 후폭풍이 거셀 전망이다. <연합뉴스>
    2009-11-17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