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단비 같은 3편의 단막극 모음
좋은 작가-연출가 조합 결과 돋보여
국립극단(예술감독 손진책)이 세 편의 단막극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단막극 연작'을 소극장 판 무대 위에 올렸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단막극 무대이다. 올해의 '단막극 연작'은 지난해의 것과는 작가와 연출의 면면이 좀 대조적이다.
지난해 '우리 단막극 연작'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던 3편의 단막극은 이강백 작 '파수꾼'(1974년 발표, 윤한솔 연출), 박조열 작 '흰둥이의 방문'(1970년, 김한내 연출), 신명순 작 '전하'(1962년, 김승철 연출)이다.
작가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젊음을 보내고 지금은 장년(長年)에 이른 세대이며, 작품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우회적으로 당시 정치권력의 문제, 어두운 사회현실, 지식인의 고뇌를 절절하게 묘사했던 것들이었다. 이 작가들의 작품을 요즘 왕성한 활동으로 주목받는 젊은 연출가들이 무대화했었다.
올해는 지금 활발하게 극작 활동을 하는 3명의 상대적으로 젊은 40대 작가들 작품을 3명의 50-60대 중진 또는 중견 연출가들이 무대화했다. 장성희 작가의 '방문'을 손진책 연출이, 최치언 작가의 '꽃과 건달과 피자와 사자'를 박근형 연출이, 김수미 작가의 '새-깃털의 유혹'을 윤호진 연출이 각각 맡았다.
각기 독립적인 작품임에도 '방문'과 '꽃과 건달과 피자와 사자' 등 앞의 두 작품은 고립과 단절, 공포와 착란·환상의 느낌이 강한 공통점이 있는데 비해 '새-깃털의 유혹'은 적극적인 짝짓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첫 번째 작품인 '방문'은 부조리극 같은 모습을 띤다. 극 중 노인은 자신 내면의 악과 싸운다. 성범죄를 저지르고 외딴 섬에 분리 수용된 상태로 화학적 거세를 위한 약물치료를 받는 노인은 자신에 대한 치료가 중단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만약 약물치료를 그친다면 악의 씨앗이 다시 발아해 자신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며 불안해한다.
거센 파도를 헤치고 섬에 도착한 두 명의 치료요원은 노인의 공포심을 역으로 이용, 치료를 계속하는 대신 과거 입증되지 않았던 노인의 다른 범죄에 대한 단서를 얻으려 한다. 이를 통해 가난과 폭력과 소외감으로 얼룩진 노인의 삶이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노인은 치료요원들을 죽이고 만다.
무대는 상징적이다. 절단된 선수(船首)와 선미(船尾)가 무대 양쪽으로 덩그러니 놓여 있어 이야기에 나오는 바다 위 배 안에서의 범죄, 고도(孤島)에서의 고립과 단절과 고통 등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두 번째 작품 '꽃과 건달과 피자와 사자'는 가장 예쁘고, 가장 폼나고, 가장 맛있고, 가장 사나운 것을 조합하여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 현재와 과거가 혼재하는 독특한 구조의 작품으로 새로운 연극적 형식을 실험한다. 이 작품은 최치언 작가의 전작 '언니들'처럼 관념적이면서 상징적인 이미지들로 그득하다. 극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찐따 피자맨. 그는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킨 채 방안에 틀어박혀 피자를 먹고 TV 보는 일에만 집착하는 남자다. TV에서 나오는 건달 영화를 보며 피자를 먹다가 피자가 목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진다. 갑자기 그의 앞에 건달 영화에 나오는 건달과 한 여인(꽃)이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없이 화장실로 통하는 문만이 유일한 공간에 갇힌다.
작품은 찐따 피자맨이 극도의 고립과 고독 상황 속에 경험하는 환영이나 정신착란을 그린 듯하다. 건달은 화장실 안에서 들리는 사자의 포효를 듣고 사자와 싸워야 한다며 화장실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되어 나온다. 그러나 사자의 포효 음향은 실제로는 수세식 변기의 물 트는 소리 같다. 무대 위의 찐따 피자맨은 삶과 죽음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꽃과 건달과 피자와 사자'(최치언 작.박근형 연출)의 한 장면. (사진=강일중)
마지막 작품인 '새-깃털의 유혹'은 앞선 두 작품과는 분위기가 틀리다. 철새도래지에 모인 새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들의 '짝 찾기'를 우화적으로 풍자한다. 수컷 기러기·원앙·거위는 각자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들의 앞에 암컷 청둥오리와 고니가 나타난다. 기러기는 쉴 새 없이 먹을 것을 잡아다 암컷들을 배불리 먹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교미에 실패하고, 거위는 매번 화려한 외모와 춤실력을 갖춘 원앙에게 밀린다. 짝짓기에 실패한 기러기와 거위는 연합전선을 구축해 암컷 꾀기에 나선다.
새들의 교미 모습을 흉내 내는 등 코믹한 장면들이 많다. 생연주가 있고, 박진영의 '허니'와 '청혼가', 백지영의 '내귀에 캔디',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 같은 노래들이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것도 익숙함을 안겨준다. 새들의 군무도 있다. 윤호진 연출은 '영웅' 등 대형 뮤지컬의 연출가로 잘 알려진 만큼 이 단막극에 뮤지컬 요소를 많이 가미해 재미있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새-깃털의 유혹'(김수미 작.윤호진 연출)의 한 장면. (사진=강일중)
'단막극 연작'의 세 개 작품 모두 작품 속에 내재된 의미나 재미를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단막극은 짧고 간결한 극 형식 속에 응축된 내용을 담아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연극이다. 그러나 요즘 국내 연극 무대에서 단막극의 공연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하면 국립극단의 단막극 연작 프로그램은 자취를 감춰가는 단막극을 되살리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 이번처럼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연출가 3인이 만들어내는 차세대 작가들의 세 개 작품을 한 번에 만난다는 것은 연극팬들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 편을 한 편 관람료 수준에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 국립극단 '단막극 연작' = 재단법인 국립극단 제작. '방문'(장성희 작·손진책 연출), '건달과 꽃과 피자와 사자'(최치언 작·박근형 연출)·'새-깃털의 유혹'(김수미 작·윤호진 연출) 등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속공연이다. 한 작품이 끝난 후 15분씩의 중간휴식이 있다. 공연시간은 두 번의 중간휴식 포함 170분.
만든 사람들은 ▲무대미술 김수희 ▲조명 최보윤 ▲음악 김철환 ▲안무 김정윤 ▲분장 최은주 ▲조연출 이우천·장병욱·김명환·이준우.
출연진은 윤종구·장지아·김동원(이상 '방문')·김형석·이혜정·정현철·노수산나·황영희(이상 '건달과 꽃과 피자와 사자')·한세라·안경희·주홍균·이정수·권민수(이상 '새-깃털의 유혹')·
공연은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5월13일까지. 관람등급은 15세 이상. 관람료는 일반 2만원. 청소년(24세까지)은 1만5천원, 소년소녀(18세까지)는 1만원. 공연문의는 국립극단 ☎1688-5966.
ringcycle@naver.com
2012-05-06